9788996989851 꽃자리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
(저자) 곽건용
꽃자리 · 2014-03-01 115*225 · 364p
꽃자리 · 2014-03-01 115*225 · 3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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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생식기라니! 이런 불경한 책이 있나!
이 책은 구약학도인 저자가 한 책방에서 《하느님의 생식기 God’s Phallus》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한 데서 시작됐다. 하느님의 생식기라니! 이런 불경한 책이 있나! 저자는 이 책이 땅에 떨어뜨린 하느님의 존엄과 영광을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21세기의 십자군이라고 할까… 책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발기발기 찢어발기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의도와는 반대로 금방 책에 빨려 들어갔고 거기서 자극받아 틈틈이 ‘하느님의 물질성’(materiality of God)에 대한 연구와 성찰에 착수하여 이 책을 쓰게 됐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처음부터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로 인식되었다고 알고 있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처음부터 영적인 신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오랫동안 전적으로 물질적인 존재(material being)로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서는 유대인들은 ‘히브리성서’ 또는 ‘타낙’(TaNaK)이라고 부르는 구약성서를 가리킨다.
하느님이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됐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깜짝 놀라거나 말도 되지 않는다고 손을 휘휘 젓거나 고개를 저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나 구약성서 가릴 것 없이 당연히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왔다고 여길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구약성서를 잘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몸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적지 않은 경우에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을 띠고 사람들에게 나타났고 심지어 사람들처럼 음식을 먹기도 했다. 사람에게 말을 하고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경우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렇듯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몸을 가진 물질적 존재로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이와 관련해서 거리끼는 측면이 분명 있다. 하느님은 분명 몸을 가진 물질적인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나 세상의 물질과는 구별되고 어딘가 다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입증할 증거는 구약성서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동일한 존재를 처음에는 하느님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사람이나 천사라고 부른다든가, 사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봐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단언하는 대목 등이 그 일부다.
구약성서의 역사를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지만 전적으로 물질적인 존재로 여겼던 하느님을 점차로 영적인 존재로 인식해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처음에는 하느님을 별 문제 없이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했던 구약성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로 그런 인식이 불편해졌다. 이 불편함이 구약성서 여기저기에 명시적,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불편함은 처음에는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말이나, 하느님의 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보지 못했거나 극히 일부만 봤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드러나다가 나중에는 하느님의 몸을 대체하는 무엇인가를 내세우는 걸로 발전한다. 그 중 하나는 하느님의 몸에 대한 시선을 하느님의 몸에서 그것이 거주하는 언약궤와 장막으로 옮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몸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거기 있음을 표현하는 다른 방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신명기 신학기 하느님을 대신해서 만들어낸 하느님의 ‘이름’과 제사장 신학이 만들어낸 하느님의 ‘영광’이란 것이다.
한편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현존과 관련해서 이와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야웨를 아는 지식’과 관련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야웨가 누구인지를 인식해나가는 과정인데 구약성서는 그 인식이 하느님을 인식의 대상으로 놓고 객관적으로 파악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데 그치지 않음을 말한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의도와 계획을 적극적으로 수행해나가는 데서 직접적이고 실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이상의 내용을 구약과 신약성서의 여러 구절들을 해석해나가면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을 현실세계와는 분리되어 저 세상만 바라보는 것으로 보는 오해와 일상의 삶을 떠나서 이른바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는 오류를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 신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신학적 내용들을 알기 쉽게 풀어서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구약학도인 저자가 한 책방에서 《하느님의 생식기 God’s Phallus》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한 데서 시작됐다. 하느님의 생식기라니! 이런 불경한 책이 있나! 저자는 이 책이 땅에 떨어뜨린 하느님의 존엄과 영광을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21세기의 십자군이라고 할까… 책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발기발기 찢어발기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의도와는 반대로 금방 책에 빨려 들어갔고 거기서 자극받아 틈틈이 ‘하느님의 물질성’(materiality of God)에 대한 연구와 성찰에 착수하여 이 책을 쓰게 됐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처음부터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로 인식되었다고 알고 있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처음부터 영적인 신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오랫동안 전적으로 물질적인 존재(material being)로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서는 유대인들은 ‘히브리성서’ 또는 ‘타낙’(TaNaK)이라고 부르는 구약성서를 가리킨다.
하느님이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됐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깜짝 놀라거나 말도 되지 않는다고 손을 휘휘 젓거나 고개를 저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나 구약성서 가릴 것 없이 당연히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왔다고 여길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구약성서를 잘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몸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적지 않은 경우에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을 띠고 사람들에게 나타났고 심지어 사람들처럼 음식을 먹기도 했다. 사람에게 말을 하고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경우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렇듯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몸을 가진 물질적 존재로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이와 관련해서 거리끼는 측면이 분명 있다. 하느님은 분명 몸을 가진 물질적인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나 세상의 물질과는 구별되고 어딘가 다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입증할 증거는 구약성서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동일한 존재를 처음에는 하느님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사람이나 천사라고 부른다든가, 사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봐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단언하는 대목 등이 그 일부다.
구약성서의 역사를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지만 전적으로 물질적인 존재로 여겼던 하느님을 점차로 영적인 존재로 인식해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처음에는 하느님을 별 문제 없이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했던 구약성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로 그런 인식이 불편해졌다. 이 불편함이 구약성서 여기저기에 명시적,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불편함은 처음에는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말이나, 하느님의 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보지 못했거나 극히 일부만 봤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드러나다가 나중에는 하느님의 몸을 대체하는 무엇인가를 내세우는 걸로 발전한다. 그 중 하나는 하느님의 몸에 대한 시선을 하느님의 몸에서 그것이 거주하는 언약궤와 장막으로 옮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몸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거기 있음을 표현하는 다른 방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신명기 신학기 하느님을 대신해서 만들어낸 하느님의 ‘이름’과 제사장 신학이 만들어낸 하느님의 ‘영광’이란 것이다.
한편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현존과 관련해서 이와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야웨를 아는 지식’과 관련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야웨가 누구인지를 인식해나가는 과정인데 구약성서는 그 인식이 하느님을 인식의 대상으로 놓고 객관적으로 파악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데 그치지 않음을 말한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의도와 계획을 적극적으로 수행해나가는 데서 직접적이고 실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이상의 내용을 구약과 신약성서의 여러 구절들을 해석해나가면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을 현실세계와는 분리되어 저 세상만 바라보는 것으로 보는 오해와 일상의 삶을 떠나서 이른바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는 오류를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 신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신학적 내용들을 알기 쉽게 풀어서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지은이 ┃ 곽건용
서울에서 출생하여 중학생 시절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고등학생 시절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학 졸업 무렵 신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의 한 교회(예장 합동 소속)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던 중 1985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소속을 옮기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신학 공부와 목회를 재개했다. 이 시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신학자인 고 안병무 박사에게서 아래로부터 성서를 읽는 시각과 서재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신학하는 방법을 배웠고, 홍근수 목사에게서 해방의 복음에 충실한 설교와 교인들과 더불어 목회하는 민주적인 목회정신을 배웠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 향린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목회하며 사회 선교, 특히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선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목회 경험을 쌓았다.
1993년 말에 로스앤젤레스 선한사마리아인교회(현 나성 향린교회)의 청빙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현재까지 같은 교회에서 인간 해방의 복음 선포,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선교, 모든 차별을 거부하는 민주적인 교회, 다문화 목회, 종교 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목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박사 과정에서 구약신학을 공부하며 학문적 성과를 목회와 삶에서 활용하는 목회를 추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1982년)했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1988년)했으며, 가족으로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다. 저서로는 《길은 끝나지 않았다》와 《하느님도 아프다》, 《예수와 함께 본 영화》가 있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중학생 시절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고등학생 시절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학 졸업 무렵 신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의 한 교회(예장 합동 소속)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던 중 1985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소속을 옮기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신학 공부와 목회를 재개했다. 이 시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신학자인 고 안병무 박사에게서 아래로부터 성서를 읽는 시각과 서재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신학하는 방법을 배웠고, 홍근수 목사에게서 해방의 복음에 충실한 설교와 교인들과 더불어 목회하는 민주적인 목회정신을 배웠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 향린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목회하며 사회 선교, 특히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선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목회 경험을 쌓았다.
1993년 말에 로스앤젤레스 선한사마리아인교회(현 나성 향린교회)의 청빙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현재까지 같은 교회에서 인간 해방의 복음 선포,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선교, 모든 차별을 거부하는 민주적인 교회, 다문화 목회, 종교 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목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박사 과정에서 구약신학을 공부하며 학문적 성과를 목회와 삶에서 활용하는 목회를 추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1982년)했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1988년)했으며, 가족으로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다. 저서로는 《길은 끝나지 않았다》와 《하느님도 아프다》, 《예수와 함께 본 영화》가 있다.
추천의 글
이 책은 구약성서의 무늬, 히브리적 사유의 본질, 고대 이스라엘 종교적 인식의 근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물질성, 특히 신의 “몸”을 연구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나를 감동케 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되면 당혹스런 느낌을 받을 것이라 예상해 본다. 그렇지만 이 책의 내용에 점점 빠져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험난한 삶의 격랑 속에서 하느님을 어떻게 믿었는지를 알기 위해 구석구석 찾아가는 진지하고 흥겨운 신앙탐구의 여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구약성서가 어떤 책인지, 구약성서의 신앙,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의식 등에 대해서도 더불어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볼 것이다. 여러분을 이 열정적인 신앙탐사 여행길에 초대한다. 여행길에 함께 하실 우리 하느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어쩌면 만면에 웃음을 띤 하느님이 저자 등을 슬쩍 치시면서, “댓끼 이놈!” 이러실 것만 같다.
_ 이종록 한일장신대 교수
_ 이종록 한일장신대 교수
목차
추천의 글_ “댓끼 이놈!”_이종록・04
여는 글_ ‘하느님의 생식기’라구? 이런 불경함이라니…・10
1장_ 왜 그들은 모두 주님을 보고도 못 알아봤을까?・27
2장_ 하느님을 본 사람은 정말 죽는가?・37
3장_ 야웨 앞에서 밥상 차려놓고 밥 먹은 사람들・53
4장_ 야웨에게 식사 대접한 사나이와 씨름한 사나이・69
5장_ 왜 말로 하면 괜찮고 형상을 만들면 안 되나・85
6장_ 사람은 ‘야웨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데…・97
7장_ 야웨가 남성이라구? 그래서 어쩔건데?・17
8장_ 왜 그렇게 가리려 했을까?・31
9장_ 둘째 계명, 도대체 뭘 하지 말라는 걸까?・45
10장_ 귀에 들린 음성은 정녕 야웨의 음성인가?・59
11장_ 야웨의 궤? 뭣에 쓰는 물건인고?・75
12장_ 그 장막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99
13장_ 장막은 왜 그렇게 많은 이름을 갖고 있을까?・15
14장_ 성전, 만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33
15장_ 성전에는 누가/무엇이 있었을까?・49
16장_ 내 얼굴 말고 내 이름이라니까!・73
17장_ 내 얼굴 말고 내 ‘카보드’라니까!・91
18장_ 결국 야웨를 알자는 얘기 아닌가!・07
19장_ 온몸으로 원초적 열정으로 정의를 실천해야・29
닫는 글_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47
참고문헌 360
여는 글_ ‘하느님의 생식기’라구? 이런 불경함이라니…・10
1장_ 왜 그들은 모두 주님을 보고도 못 알아봤을까?・27
2장_ 하느님을 본 사람은 정말 죽는가?・37
3장_ 야웨 앞에서 밥상 차려놓고 밥 먹은 사람들・53
4장_ 야웨에게 식사 대접한 사나이와 씨름한 사나이・69
5장_ 왜 말로 하면 괜찮고 형상을 만들면 안 되나・85
6장_ 사람은 ‘야웨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데…・97
7장_ 야웨가 남성이라구? 그래서 어쩔건데?・17
8장_ 왜 그렇게 가리려 했을까?・31
9장_ 둘째 계명, 도대체 뭘 하지 말라는 걸까?・45
10장_ 귀에 들린 음성은 정녕 야웨의 음성인가?・59
11장_ 야웨의 궤? 뭣에 쓰는 물건인고?・75
12장_ 그 장막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99
13장_ 장막은 왜 그렇게 많은 이름을 갖고 있을까?・15
14장_ 성전, 만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33
15장_ 성전에는 누가/무엇이 있었을까?・49
16장_ 내 얼굴 말고 내 이름이라니까!・73
17장_ 내 얼굴 말고 내 ‘카보드’라니까!・91
18장_ 결국 야웨를 알자는 얘기 아닌가!・07
19장_ 온몸으로 원초적 열정으로 정의를 실천해야・29
닫는 글_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47
참고문헌 360
책 속으로
*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몸(physical body), 또는 하느님의 물질성(materiality of God)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주 언급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물질적인 몸을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
* 구약성서에는 분명히 그런 얘기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럼 “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거짓말인가? 아니면 극히 일부지만 예외가 있었던 걸까?
* “야 웨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씀하셨다”고 전한다(출애굽기 33:11).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야웨가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했다니! 그러고도 모세가 죽지 않았다니! 바로 앞의 “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어떻게 된 건가. 그새 무효가 됐나? 그게 아니면 모세만은 예외인가? 모세는 야웨를 봐도 죽지 않는단 얘긴가? 바로 앞에서 한 말 을 이렇듯 쉽게 뒤집어도 되나? 이래서야 야웨가 하는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 야웨의 외모와 관련해서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야웨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그의 외모를 묘사하길 꺼리는 경향이다
* 일흔네 명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they beheld God, and ate and drank)고 했다. 이들은 하느님을 ‘보면서’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셨다.’
* 사람이 야웨를 봤을 때 발 윗쪽은 바라보지 못하고 아랫쪽만 바라봤던 이유도, 모세가 야웨의 앞모습을 못 보고 뒷모습만 볼 수 있었던 까닭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둘째 계명이 야웨의 형상 만드는 것 을 절대 금지한 까닭도 야웨 몸의 특정 부분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려 했음이 아닐까?
* 왜 야웨는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을까? 그건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강한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야웨 하느님을 마치 사람인 것처럼 그리고 인식한다. 그건 야웨와 소통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사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웨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 아담, 하와 이야기와 노아 이야기 사이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생식기를 가리는 데 관심이 많다는 점이 그 첫째이고, 생식기 드러내는 걸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아담 이야기에서 선악과 사건 이전에는 그 반대였지만)이 둘째이며, 성적인 자각이 생김과 동시에 이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는 점이 셋째이고, 쳐다보는 것(gaze)과 욕망(desire) 사이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 그 마지막이다. 어떤가? 흥미로운 얘기 아닌가?
* 후대에 이르러 우상숭배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우상숭배는 예배자가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해 옳지 않은 개념과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곧 우상 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상과의 싸움은 ‘상상력’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 됐다.
* 구약성서는 자연을 관찰하거나 인생에 대해 깊이 관조한다고 해서 야웨를 알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부수적이며 부분적이다. 구약성서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야웨와 만나고 부딪쳐야 야웨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구약성서는 역사를 단순히 벌어진 사건에 대한 객관적 진술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이스라엘이 야웨와 온 몸으로 만나고 온 영혼으로 부딪치면서 야웨를 알아가는 과정을 풀어 놓은 이야기다.
* 예언자들은 골방에 들어앉아서 세상과의 연을 끊고 조용히 침묵 속에서 묵상하면서 야웨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사건들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 복판에서, 높고 거친 풍랑이 이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뛰어들어 그 풍랑을 헤쳐나가면서 야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얻은 야웨에 대한 지식은 역사적 사건에 참 여함으로써, 특히 야웨의 구원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체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야웨 를 아는 데 있어서 눈으로 보는 물질성과 귀로 듣는 물질성이 만나는 ‘만남의 장막’이었던 셈이다
* 야웨를 아는 지식은 무엇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실천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 의 인권을 세워주는 실천적 행위가 바로 ‘야웨를 아는 지식’이란 얘기다. ‘야웨를 아는 지식’이 그 같은 행위를 이끌어낸다는 뜻도 아니고 야웨를 알게 되면 그런 행위를 하게 된다는 뜻도 아니다. 야웨를 아는 지식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인권을 세워주는 일은 그 사이에 어떤 매개물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동격이란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야웨를 아는 지식=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인권을 세워주는 일’이 된다.
* 구약성서가 말하는 야웨에 대한 지식은 야곱처럼 직접 씨름해야 얻을 수 있는 실천적인 지식이고 섹스를 하듯 원초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비로소 얻는 앎이다. 구약성서는 가장 물질적일 때 가장 영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성서는 몸으로 체득하지 않으면 영적인 깨달음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구약성서의 인간학에 따르면 사람의 지성과 감성은 심장에 자리 잡고 있다. 지성과 감성이 거기에 있는 데 영성인들 다른 데 있으랴. 상대의 심장 박동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려면 그를 끌어안아야 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그 가 야웨의 심장 박동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 구약성서에는 분명히 그런 얘기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럼 “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거짓말인가? 아니면 극히 일부지만 예외가 있었던 걸까?
* “야 웨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씀하셨다”고 전한다(출애굽기 33:11).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야웨가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했다니! 그러고도 모세가 죽지 않았다니! 바로 앞의 “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어떻게 된 건가. 그새 무효가 됐나? 그게 아니면 모세만은 예외인가? 모세는 야웨를 봐도 죽지 않는단 얘긴가? 바로 앞에서 한 말 을 이렇듯 쉽게 뒤집어도 되나? 이래서야 야웨가 하는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 야웨의 외모와 관련해서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야웨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그의 외모를 묘사하길 꺼리는 경향이다
* 일흔네 명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they beheld God, and ate and drank)고 했다. 이들은 하느님을 ‘보면서’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셨다.’
* 사람이 야웨를 봤을 때 발 윗쪽은 바라보지 못하고 아랫쪽만 바라봤던 이유도, 모세가 야웨의 앞모습을 못 보고 뒷모습만 볼 수 있었던 까닭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둘째 계명이 야웨의 형상 만드는 것 을 절대 금지한 까닭도 야웨 몸의 특정 부분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려 했음이 아닐까?
* 왜 야웨는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을까? 그건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강한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야웨 하느님을 마치 사람인 것처럼 그리고 인식한다. 그건 야웨와 소통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사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웨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 아담, 하와 이야기와 노아 이야기 사이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생식기를 가리는 데 관심이 많다는 점이 그 첫째이고, 생식기 드러내는 걸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아담 이야기에서 선악과 사건 이전에는 그 반대였지만)이 둘째이며, 성적인 자각이 생김과 동시에 이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는 점이 셋째이고, 쳐다보는 것(gaze)과 욕망(desire) 사이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 그 마지막이다. 어떤가? 흥미로운 얘기 아닌가?
* 후대에 이르러 우상숭배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우상숭배는 예배자가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해 옳지 않은 개념과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곧 우상 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상과의 싸움은 ‘상상력’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 됐다.
* 구약성서는 자연을 관찰하거나 인생에 대해 깊이 관조한다고 해서 야웨를 알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부수적이며 부분적이다. 구약성서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야웨와 만나고 부딪쳐야 야웨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구약성서는 역사를 단순히 벌어진 사건에 대한 객관적 진술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이스라엘이 야웨와 온 몸으로 만나고 온 영혼으로 부딪치면서 야웨를 알아가는 과정을 풀어 놓은 이야기다.
* 예언자들은 골방에 들어앉아서 세상과의 연을 끊고 조용히 침묵 속에서 묵상하면서 야웨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사건들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 복판에서, 높고 거친 풍랑이 이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뛰어들어 그 풍랑을 헤쳐나가면서 야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얻은 야웨에 대한 지식은 역사적 사건에 참 여함으로써, 특히 야웨의 구원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체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야웨 를 아는 데 있어서 눈으로 보는 물질성과 귀로 듣는 물질성이 만나는 ‘만남의 장막’이었던 셈이다
* 야웨를 아는 지식은 무엇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실천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 의 인권을 세워주는 실천적 행위가 바로 ‘야웨를 아는 지식’이란 얘기다. ‘야웨를 아는 지식’이 그 같은 행위를 이끌어낸다는 뜻도 아니고 야웨를 알게 되면 그런 행위를 하게 된다는 뜻도 아니다. 야웨를 아는 지식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인권을 세워주는 일은 그 사이에 어떤 매개물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동격이란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야웨를 아는 지식=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인권을 세워주는 일’이 된다.
* 구약성서가 말하는 야웨에 대한 지식은 야곱처럼 직접 씨름해야 얻을 수 있는 실천적인 지식이고 섹스를 하듯 원초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비로소 얻는 앎이다. 구약성서는 가장 물질적일 때 가장 영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성서는 몸으로 체득하지 않으면 영적인 깨달음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구약성서의 인간학에 따르면 사람의 지성과 감성은 심장에 자리 잡고 있다. 지성과 감성이 거기에 있는 데 영성인들 다른 데 있으랴. 상대의 심장 박동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려면 그를 끌어안아야 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그 가 야웨의 심장 박동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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