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88953153172 두란노
모두가 자신의 믿음 없음과 싸우고 있다
[원제] Battling Unbelief
(저자) 존 파이퍼 / 윤종석
두란노 · 2026-06-17 125*200 · 232p
(저자) 존 파이퍼 / 윤종석
두란노 · 2026-06-17 125*200 · 2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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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설명
인간의 욕망과 믿음의 역동을 밀도 있게 파고든 신학자, 존 파이퍼!
일상의 자리로 스며드는 탄탄한 신학
하나님보다 ‘다른 약속’이 더 진짜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해
스스로 선택한 빈곤한 정답들에 관하여
의무감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를 짓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가 저마다 그럴듯한 ‘행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쾌락과 자극이 넘쳐 나는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점점 예수가 아니라 빠른 답을 찾아 헤매고 있다. 너무 쉽게 죄의 ‘가짜 약속’에 속아 영적 무기력에 빠져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한 책이 출간되었다. 존 파이퍼는 이 책에서 우리의 영적 고갈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우리 삶을 잠식하는 8가지 상태(염려, 교만, 수치심, 조급증, 탐심, 원한, 낙심, 정욕)의 뿌리를 추적하며, 이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의 불신, 곧 믿음 없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낸다. 이러한 영적 노예 상태는 하나님만이 우리가 갈망할 만한 분이시며, 유일한 참된 만족이심을 신뢰할 때에만 비로소 종식된다. 신앙은 평화로운 안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장래의 은혜를 붙들기 위한 거룩한 싸움이다.
예비된 은혜를 충분히 믿지 못할 때
인간은 무엇에 끌려다니는가
염려, 교만, 수치심, 조급증, 탐심, 원한, 낙심, 정욕
내 삶의 가장 익숙한 선택들과 씨름할 시간!
이 책은 단순한 금지령의 나열이 아니다. 죄가 건네는 ‘가짜 약속’을 하나님의 ‘더 큰 약속’으로 파쇄하는 강력한 영적 화력에 관한 기록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가장 약한 고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쌓아 두신 ‘장래의 은혜’로 그 속박을 끊어 내는 아주 실제적인 영적 전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래의 은혜’가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기반한다. 죄의 달콤한 유혹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할 수 없이 훨씬 더 매력적임을 깨닫는 순간, 불신의 힘은 꺾이고 참된 자유가 시작된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견고한 기쁨을 누리길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영원토록 예비된 ‘장래의 은혜’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오늘의 삶을 지탱하는 능력으로 누리게 하는 강력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일상의 자리로 스며드는 탄탄한 신학
하나님보다 ‘다른 약속’이 더 진짜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해
스스로 선택한 빈곤한 정답들에 관하여
의무감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를 짓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가 저마다 그럴듯한 ‘행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쾌락과 자극이 넘쳐 나는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점점 예수가 아니라 빠른 답을 찾아 헤매고 있다. 너무 쉽게 죄의 ‘가짜 약속’에 속아 영적 무기력에 빠져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한 책이 출간되었다. 존 파이퍼는 이 책에서 우리의 영적 고갈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우리 삶을 잠식하는 8가지 상태(염려, 교만, 수치심, 조급증, 탐심, 원한, 낙심, 정욕)의 뿌리를 추적하며, 이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의 불신, 곧 믿음 없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낸다. 이러한 영적 노예 상태는 하나님만이 우리가 갈망할 만한 분이시며, 유일한 참된 만족이심을 신뢰할 때에만 비로소 종식된다. 신앙은 평화로운 안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장래의 은혜를 붙들기 위한 거룩한 싸움이다.
예비된 은혜를 충분히 믿지 못할 때
인간은 무엇에 끌려다니는가
염려, 교만, 수치심, 조급증, 탐심, 원한, 낙심, 정욕
내 삶의 가장 익숙한 선택들과 씨름할 시간!
이 책은 단순한 금지령의 나열이 아니다. 죄가 건네는 ‘가짜 약속’을 하나님의 ‘더 큰 약속’으로 파쇄하는 강력한 영적 화력에 관한 기록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가장 약한 고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쌓아 두신 ‘장래의 은혜’로 그 속박을 끊어 내는 아주 실제적인 영적 전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래의 은혜’가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기반한다. 죄의 달콤한 유혹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할 수 없이 훨씬 더 매력적임을 깨닫는 순간, 불신의 힘은 꺾이고 참된 자유가 시작된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견고한 기쁨을 누리길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영원토록 예비된 ‘장래의 은혜’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오늘의 삶을 지탱하는 능력으로 누리게 하는 강력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지은이 ┃ 존 파이퍼 John Piper (1946~)
이 시대 기독교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설교자이자 신학자. ‘기독교 희락주의자’, ‘기쁨의 신학자’로 불린다. 1946년에 태어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휘튼칼리지에서 영문학(전공)과 철학(부전공)을, 풀러신학대학원(목회학 석사)과 독일 뮌헨대학교(신학 박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6년간 베델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80년, 설교자로의 부르심을 압도적으로 느낀 뒤 미네소타주 베들레헴침례교회(Bethlehem Baptist Church)에 부임했다. 이후 2013년까지 33년간 설교 목사로 섬겼다. 목회 현장에서 은퇴한 뒤 지금까지 디자이어링갓(Desiring God Ministries) 사역을 하며, 베들레헴신학교에서 총장직을 맡고 있다.
《존 파이퍼의 거듭남》, 《존 파이퍼의 병상의 은혜》, 《존 파이퍼의 초자연적 성경 읽기》, 《강해의 희열》, 《장래의 은혜》, 《삶을 허비하지 말라》, 《하나님을 기뻐하라》, 《섭리》, 《결혼 신학》, 《하나님께 굶주린 삶》 등의 저서가 있으며, 공저로 《당신의 입을 거룩하게 하라》가 있다.
www.desiringGod.org
옮긴이 ┃ 윤종석
《팀 켈러, 죄를 말하다》, 《일상 혁명가》, 《하나님의 침묵》, 《기도의 자리로》, 《하나님의 임재 연습》,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등 다수의 책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다.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골든게이트침례신학교에서 교육학(M.A.)을,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상담학(M.A.)을 전공했다.
이 시대 기독교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설교자이자 신학자. ‘기독교 희락주의자’, ‘기쁨의 신학자’로 불린다. 1946년에 태어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휘튼칼리지에서 영문학(전공)과 철학(부전공)을, 풀러신학대학원(목회학 석사)과 독일 뮌헨대학교(신학 박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6년간 베델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80년, 설교자로의 부르심을 압도적으로 느낀 뒤 미네소타주 베들레헴침례교회(Bethlehem Baptist Church)에 부임했다. 이후 2013년까지 33년간 설교 목사로 섬겼다. 목회 현장에서 은퇴한 뒤 지금까지 디자이어링갓(Desiring God Ministries) 사역을 하며, 베들레헴신학교에서 총장직을 맡고 있다.
《존 파이퍼의 거듭남》, 《존 파이퍼의 병상의 은혜》, 《존 파이퍼의 초자연적 성경 읽기》, 《강해의 희열》, 《장래의 은혜》, 《삶을 허비하지 말라》, 《하나님을 기뻐하라》, 《섭리》, 《결혼 신학》, 《하나님께 굶주린 삶》 등의 저서가 있으며, 공저로 《당신의 입을 거룩하게 하라》가 있다.
www.desiringGod.org
옮긴이 ┃ 윤종석
《팀 켈러, 죄를 말하다》, 《일상 혁명가》, 《하나님의 침묵》, 《기도의 자리로》, 《하나님의 임재 연습》,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등 다수의 책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다.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골든게이트침례신학교에서 교육학(M.A.)을,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상담학(M.A.)을 전공했다.
목차
프롤로그. 가장 강력한 인생 스포일러, “나를 위해 쌓아 두신 은혜가 있다”
1. 염려와 싸우다 : 그분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 없음
오늘도 ‘어쩌면, 만약에, 혹시나’에 끌려다녔다
2. 교만과 싸우다 : 그분의 주권에 대한 믿음 없음
하나님 없이도 해 볼 만하다고 착각한 순간들
3. 수치심과 싸우다 : 그분의 평가에 대한 믿음 없음
타인의 시선에 갇혀 하나님의 시선을 잊어버리다
4. 조급증과 싸우다 : 그분의 타이밍에 대한 믿음 없음
내 인생만 멀리 돌아가는 기분이 들 때
5. 탐심과 싸우다 : 그분의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 없음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
6. 원한과 싸우다 : 그분의 공의로움에 대한 믿음 없음
복수라는 정의를 붙들다가 긍휼의 자유를 잃다
7. 낙심과 싸우다 : 그분의 회복시키심에 대한 믿음 없음
마음 깊이 드리운 어둠 속에 나를 내버려두다
8. 정욕과 싸우다 : 참된 만족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 없음
달콤한 독약과 영원한 희열을 맞바꾸다
에필로그. 싸우기를 포기하지 말라, 다함없이 흐르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다
주
1. 염려와 싸우다 : 그분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 없음
오늘도 ‘어쩌면, 만약에, 혹시나’에 끌려다녔다
2. 교만과 싸우다 : 그분의 주권에 대한 믿음 없음
하나님 없이도 해 볼 만하다고 착각한 순간들
3. 수치심과 싸우다 : 그분의 평가에 대한 믿음 없음
타인의 시선에 갇혀 하나님의 시선을 잊어버리다
4. 조급증과 싸우다 : 그분의 타이밍에 대한 믿음 없음
내 인생만 멀리 돌아가는 기분이 들 때
5. 탐심과 싸우다 : 그분의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 없음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
6. 원한과 싸우다 : 그분의 공의로움에 대한 믿음 없음
복수라는 정의를 붙들다가 긍휼의 자유를 잃다
7. 낙심과 싸우다 : 그분의 회복시키심에 대한 믿음 없음
마음 깊이 드리운 어둠 속에 나를 내버려두다
8. 정욕과 싸우다 : 참된 만족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 없음
달콤한 독약과 영원한 희열을 맞바꾸다
에필로그. 싸우기를 포기하지 말라, 다함없이 흐르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다
주
책 속으로
<20-22쪽 중에서>
죄가 솔깃한 이유는 뭔가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늘 이런 식으로 속삭이지요. “탈세해서 생긴 여윳돈으로 평소에 갖고 싶던 걸 사 봐. 엄청 행복해질걸?” “음란물을 볼 때 밀려오는 짜릿한 쾌락이 양심을 지키며 얻는 떳떳한 기쁨보다 훨씬 낫지.” “아무도 안 볼 때 이 쿠키를 몰래 먹어 봐. 상한 마음도 달래지고, 지금 당장의 힘든 상황을 버텨 내는 데 이만한 게 없을걸?”
의무감으로 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유혹하는 죄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고 경고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죄가 하는 약속은 다 거짓말입니다.
장래의 은혜를 믿기 위해 불신과 싸운다는 말은 불로 불에 맞선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더 나은 약속으로 죄의 약속에 대항해야 합니다. 우리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큰 약속을 붙들고 특정한 죄를 향해 “이것과 한번 비교해 봐라!” 하고 호령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 13절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영으로써〔성령, ESV〕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이 구절을 주제로 쓴 책에서 “죄를 죽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입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죄의 행실을 사전에 죽이려면 죄에 양분을 공급하는 뿌리를 잘라 내야 해요. 죄의 뿌리는 거짓입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성령의 검”(엡 6:17)인 하나님의 말씀을 휘둘러야 합니다. …(중략)…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진리와 거기에 딸린 모든 약속을 꼭 붙들고 어떤 상황에서든 거기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약속의 위력으로 죄의 심줄을 끊습니다. 우리는 장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사랑의 물줄기를 흘려보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37-38쪽 중에서>
자동차 경주를 하고 있는데 적수가 당신의 완주를 방해하려고 앞 유리에 진흙을 한 움큼 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잠시 시야가 가려져 차가 휘청거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경주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엉뚱한 트랙을 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당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다면 적수가 굳이 당신을 건드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당신이 할 일은 와이퍼를 켜고 어서 워셔액을 뿌리는 것이지요. 염려가 닥쳐오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놀라운 미래가 희미해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예 없다거나 천국에 가지 못할 거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믿음이 공격받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처음에 불신이라는 공격에 한 방 맞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던 우리 믿음이 털털거리며 휘청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트랙에 남아 완주할 수 있을지는, 은혜 안에서 어떻게 저항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마디로, 염려라는 불신에 반격을 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당신이라면 와이퍼를 켜고 워셔액을 뿌리시겠습니까?
시편 56편 3절을 볼게요. 시편 기자는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했지 “나는 두려워하는 날이 없나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닥쳐오면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염려가 전혀 없어야 참된 신자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 대신 염려가 닥쳐올 때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5장 7절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결코 염려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지요. 염려가 찾아오면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앞 유리에 염려라는 진흙이 묻어 잠시 전방이 보이지 않고 차가 휘청거리거든, 즉시 와이퍼를 켜고 워셔액을 뿌리십시오. 그래서 저는 매일 염려와 씨름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건 지극히 정상이다”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 삶도 그랬습니다.
<62-63쪽 중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또한 교만한 자랑으로 인해 낮아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낮추어 들판의 소처럼 풀을 뜯게 하셨습니다(33절). 결국 그는 자신의 권세보다 훨씬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세를 기뻐하게 됩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35, 37절).
느부갓네살의 교만을 치유한 것은 단순히 머리로 얻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난 새로운 기쁨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다는 것은 믿음이 깨어났다는 증거예요.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은혜로 장래를 통치하시며,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사실을 진심으로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인정하며 만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가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한 것입니다.
<71-72쪽 중에서>
참 아이러니하지요.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충분하다는 자만심에 차 있으니, 남에게 존중받으려는 욕구에서 해방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자만심이라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본래 자아는 스스로 만족하거나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충분할 수 없어요. 우리는 본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며, 그림자요, 메아리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자원으로 만족하려 애쓰는 영혼에게는 늘 공허함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남에게 칭찬받으려는 헛된 욕구는 장래의 은혜를 믿지 않는 교만이 실제로 무력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영광받으려는 욕구가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를 다 보셨고,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래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면 믿음이 불가능해집니다. 왜일까요? 믿음이란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호평으로 이 욕구를 채우려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등지고 맙니다. 하지만 자아에서 만족을 얻으려던 데서 돌이켜(회개)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믿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그 욕구를 몰아낼 것입니다(요 4:14).
<87-88쪽 중에서>
성경에서 올바른 수치심과 잘못된 수치심을 가르는 기준은 당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리석거나 나빠 보이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당신의 행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여부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도 중요해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못해서입니다. 우리의 수치심은 다분히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이에요. 이 사실을 직시하기 전에는 수치심의 뿌리와 싸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수치심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에서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가 다른 그 누구의 평가보다도 무한히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달으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 일컫는 놀라운 것들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사라질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잘못된 수치심인 이유가 또 있어요. 바로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낮추지요. 하지만 세상의 눈에는 복음이 능력처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약해 보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제 발로 서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어린아이처럼 되어서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라고 말하니까요.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죄인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까지도 부끄러워하기 쉬운 이유는, 그분이 능력을 나타내시는 방식이 세상의 눈에는 전혀 강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93-94쪽 중에서>
올바른 수치심의 경우 고통이 따르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 고통 속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수치심이 그저 고통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죄를 지은 여자”(눅 7:37)라고 언급되는 한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와 울며 그분의 발을 씻긴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시몬은 눈빛으로 좌중에게 이 여자가 죄인임을 알렸고, 예수님이 그녀의 접촉을 허용하는 것 또한 부당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죄인이었으니, 여자가 수치심을 느낀 것은 당연했지요. 하지만 그 수치심은 그 상태로 끝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8절)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그분은 다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라는 말씀으로 여자의 믿음을 북돋아 주셨어요.
예수님은 어떻게 그 여인을 도와 수치심의 악영향과 싸우게 하셨습니까? 바로 약속을 주셨어요.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앞날은 영원토록 평안할 것이다.” 그분은 과거의 용서가 장래의 평안을 낳으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그 여인에게 남은 일은 장래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말씀과 행위로 그 여인을 용서하고 해방하신 예수님의 권위에서 난 것입니다. 여인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성난 얼굴로 노려보는 사람들의 정죄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수치심이 끝났고 이제부터 장래에까지 용서받았으니, 평안히 가서 온전하고 자유롭게 살라고 다독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여인은 누구를 신뢰해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의 약속으로 영혼을 채워야 할까요?
<116-117쪽 중에서>
42,000여 명이 넘는 유대인 포로들이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신실한 삶의 길은 곧장 영광으로 이어질 때가 드물어요. 당시 유다의 적들은 유다 백성의 사기를 꺾으며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스 4:4-5). 유대 민족이 느꼈을 좌절감과 조급함을 상상해 보십시오.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나님이 문을 활짝 열어 주셨나 싶었는데, 어느새 장애물에 부딪혀 건축이 중단된 것입니다. … (중략) … 에스라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워 건축을 재개하게 하십니다.
물론 이때도 적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성전 건축을 저지하려고 새로 왕위에 오른 다리오왕에게 편지까지 보냅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완전히 역풍을 맞고 말지요. 왜 건축이 잠시 중단되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셨는지, 그 이유가 비로소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다리오는 편지에 동조하여 성전 건축을 중단시키기는커녕 문서 창고를 조사해 고레스가 성전 건축을 승인한 첫 조서를 찾아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대 민족이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리오가 유다의 적들에게 보낸 답신에 이렇게 명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스 6:7-8).
하나님이 잠시 동안의 차질을 허용하신 결과, 성전이 완성될 뿐만 아니라 성전 건축 경비까지 타국의 왕이 전적으로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앞날에 임할 은혜를 꿰뚫어 볼 믿음이 있다면, 어찌 조급함을 이겨 내지 못하겠습니까?
<167-169쪽 중에서>
만일 믿음이 단순히 십자가를 돌아보며 ‘벌을 면했다’는 사실에 머문다면 우리는 계속 원한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서 저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이 파고들어야 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과거를 돌아볼 때 단순히 벌을 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장래를 주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분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그 장래란 그분과의 화목한 교제 안에서 영원히 이어지는 끝없는 내일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딱히 오래된 원한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묵은 상처와 실망에서 당신을 놀랍게 해방하시고, 그것들을 다 내려놓을 은혜를 주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단기적 분노가 있는지도 반드시 점검해 보세요. 오래된 원한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반복적으로 시달리는 좌절이 있지는 않습니까? 똑같은 단기적 분노가 만성적으로 되풀이되지는 않습니까? 자녀나 배우자, 교회 사람, 직장 상사의 어떤 성향이 매주 당신의 속을 긁어 놓습니까? 그래서 이를 갈며, ‘더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이유들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뇌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 경험으로 보아, 반복해서 찾아오는 이런 단기적 좌절도 큰 학대나 배신으로 인한 오래된 원한 못지않게 불신과 싸워야 하는 영역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날마다 구체적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장기적인 것이든 단기적인 것이든,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원한은 장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고지대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원한에 필요한 것은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자기연민, 두려움, 공허감입니다. 하나님은 장래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건만, 원한은 그분으로 만족할 때 임하는 자족과 확신과 충만한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189-190쪽 중에서>
삶에 어떤 일이 닥쳐 당신의 장래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때 잊지 마십시오. 폭탄이 터질 때의 첫 충격파는 죄가 아닙니다. 진짜 위험은 거기에 굴복하는 거예요. 영적 싸움에 나서지 않은 채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항복의 뿌리에는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장래의 은혜를 믿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 길은 고통 없는 길도 아니고, 수동적인 길도 아닙니다. 믿을 만한 신앙의 친구들을 찾으세요. 그들에게 당신의 영혼을 열어 보이고,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세요. 하나님 아버지께 당신의 영혼을 쏟아 놓으십시오. 그분의 주권적 지혜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의 보배롭고 장엄한 약속 안에서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197-198쪽 중에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은 대개 개인 차원에서 자기 몸과 생각으로 무엇을 하든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죄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은 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정작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건 세계 평화나 환경 문제, 인종 화합, 사회 정의, 의료 개혁, 폭력 퇴치 같은 굵직한 문제가 아닌가요? 이 사람 저 사람과 잠자리를 갖는 것쯤은 별일 아니지요. 정의를 위해 시위에 나서거나 제네바 평화 협상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면, 〈플레이보이〉지를 뒤적이는 일쯤이야 지극히 사소한 일 아닌가요?”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아주 다릅니다. 그런 국제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 인간과 관계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단순한 통계 수치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점은 동물이나 나무와 달리 천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지옥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중요한 이유는 숨이 붙어 있어서가 아니에요. 숨이 멎은 뒤에도 영원히 마음과 생각과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은, 정욕의 결과가 전쟁이나 환경 재해의 결과보다 더 해롭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해악은 결국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육체의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입니다.
죄가 솔깃한 이유는 뭔가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늘 이런 식으로 속삭이지요. “탈세해서 생긴 여윳돈으로 평소에 갖고 싶던 걸 사 봐. 엄청 행복해질걸?” “음란물을 볼 때 밀려오는 짜릿한 쾌락이 양심을 지키며 얻는 떳떳한 기쁨보다 훨씬 낫지.” “아무도 안 볼 때 이 쿠키를 몰래 먹어 봐. 상한 마음도 달래지고, 지금 당장의 힘든 상황을 버텨 내는 데 이만한 게 없을걸?”
의무감으로 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유혹하는 죄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고 경고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죄가 하는 약속은 다 거짓말입니다.
장래의 은혜를 믿기 위해 불신과 싸운다는 말은 불로 불에 맞선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더 나은 약속으로 죄의 약속에 대항해야 합니다. 우리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큰 약속을 붙들고 특정한 죄를 향해 “이것과 한번 비교해 봐라!” 하고 호령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 13절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영으로써〔성령, ESV〕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이 구절을 주제로 쓴 책에서 “죄를 죽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입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죄의 행실을 사전에 죽이려면 죄에 양분을 공급하는 뿌리를 잘라 내야 해요. 죄의 뿌리는 거짓입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성령의 검”(엡 6:17)인 하나님의 말씀을 휘둘러야 합니다. …(중략)…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휘두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진리와 거기에 딸린 모든 약속을 꼭 붙들고 어떤 상황에서든 거기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약속의 위력으로 죄의 심줄을 끊습니다. 우리는 장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사랑의 물줄기를 흘려보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37-38쪽 중에서>
자동차 경주를 하고 있는데 적수가 당신의 완주를 방해하려고 앞 유리에 진흙을 한 움큼 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잠시 시야가 가려져 차가 휘청거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경주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엉뚱한 트랙을 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당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다면 적수가 굳이 당신을 건드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당신이 할 일은 와이퍼를 켜고 어서 워셔액을 뿌리는 것이지요. 염려가 닥쳐오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놀라운 미래가 희미해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예 없다거나 천국에 가지 못할 거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믿음이 공격받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처음에 불신이라는 공격에 한 방 맞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던 우리 믿음이 털털거리며 휘청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트랙에 남아 완주할 수 있을지는, 은혜 안에서 어떻게 저항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마디로, 염려라는 불신에 반격을 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당신이라면 와이퍼를 켜고 워셔액을 뿌리시겠습니까?
시편 56편 3절을 볼게요. 시편 기자는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했지 “나는 두려워하는 날이 없나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닥쳐오면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염려가 전혀 없어야 참된 신자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 대신 염려가 닥쳐올 때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5장 7절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결코 염려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지요. 염려가 찾아오면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앞 유리에 염려라는 진흙이 묻어 잠시 전방이 보이지 않고 차가 휘청거리거든, 즉시 와이퍼를 켜고 워셔액을 뿌리십시오. 그래서 저는 매일 염려와 씨름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건 지극히 정상이다”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 삶도 그랬습니다.
<62-63쪽 중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또한 교만한 자랑으로 인해 낮아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낮추어 들판의 소처럼 풀을 뜯게 하셨습니다(33절). 결국 그는 자신의 권세보다 훨씬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세를 기뻐하게 됩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35, 37절).
느부갓네살의 교만을 치유한 것은 단순히 머리로 얻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난 새로운 기쁨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다는 것은 믿음이 깨어났다는 증거예요.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은혜로 장래를 통치하시며,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사실을 진심으로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인정하며 만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가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한 것입니다.
<71-72쪽 중에서>
참 아이러니하지요.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충분하다는 자만심에 차 있으니, 남에게 존중받으려는 욕구에서 해방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자만심이라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본래 자아는 스스로 만족하거나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충분할 수 없어요. 우리는 본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일 뿐이며, 그림자요, 메아리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자원으로 만족하려 애쓰는 영혼에게는 늘 공허함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남에게 칭찬받으려는 헛된 욕구는 장래의 은혜를 믿지 않는 교만이 실제로 무력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영광받으려는 욕구가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를 다 보셨고,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래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면 믿음이 불가능해집니다. 왜일까요? 믿음이란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호평으로 이 욕구를 채우려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등지고 맙니다. 하지만 자아에서 만족을 얻으려던 데서 돌이켜(회개)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믿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그 욕구를 몰아낼 것입니다(요 4:14).
<87-88쪽 중에서>
성경에서 올바른 수치심과 잘못된 수치심을 가르는 기준은 당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리석거나 나빠 보이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당신의 행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 여부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도 중요해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못해서입니다. 우리의 수치심은 다분히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이에요. 이 사실을 직시하기 전에는 수치심의 뿌리와 싸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수치심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에서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가 다른 그 누구의 평가보다도 무한히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달으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 일컫는 놀라운 것들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사라질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잘못된 수치심인 이유가 또 있어요. 바로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낮추지요. 하지만 세상의 눈에는 복음이 능력처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약해 보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제 발로 서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어린아이처럼 되어서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라고 말하니까요.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죄인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까지도 부끄러워하기 쉬운 이유는, 그분이 능력을 나타내시는 방식이 세상의 눈에는 전혀 강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93-94쪽 중에서>
올바른 수치심의 경우 고통이 따르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 고통 속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수치심이 그저 고통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죄를 지은 여자”(눅 7:37)라고 언급되는 한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와 울며 그분의 발을 씻긴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시몬은 눈빛으로 좌중에게 이 여자가 죄인임을 알렸고, 예수님이 그녀의 접촉을 허용하는 것 또한 부당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죄인이었으니, 여자가 수치심을 느낀 것은 당연했지요. 하지만 그 수치심은 그 상태로 끝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8절)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그분은 다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라는 말씀으로 여자의 믿음을 북돋아 주셨어요.
예수님은 어떻게 그 여인을 도와 수치심의 악영향과 싸우게 하셨습니까? 바로 약속을 주셨어요.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앞날은 영원토록 평안할 것이다.” 그분은 과거의 용서가 장래의 평안을 낳으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그 여인에게 남은 일은 장래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말씀과 행위로 그 여인을 용서하고 해방하신 예수님의 권위에서 난 것입니다. 여인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성난 얼굴로 노려보는 사람들의 정죄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수치심이 끝났고 이제부터 장래에까지 용서받았으니, 평안히 가서 온전하고 자유롭게 살라고 다독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여인은 누구를 신뢰해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의 약속으로 영혼을 채워야 할까요?
<116-117쪽 중에서>
42,000여 명이 넘는 유대인 포로들이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신실한 삶의 길은 곧장 영광으로 이어질 때가 드물어요. 당시 유다의 적들은 유다 백성의 사기를 꺾으며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스 4:4-5). 유대 민족이 느꼈을 좌절감과 조급함을 상상해 보십시오.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나님이 문을 활짝 열어 주셨나 싶었는데, 어느새 장애물에 부딪혀 건축이 중단된 것입니다. … (중략) … 에스라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워 건축을 재개하게 하십니다.
물론 이때도 적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성전 건축을 저지하려고 새로 왕위에 오른 다리오왕에게 편지까지 보냅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완전히 역풍을 맞고 말지요. 왜 건축이 잠시 중단되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셨는지, 그 이유가 비로소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다리오는 편지에 동조하여 성전 건축을 중단시키기는커녕 문서 창고를 조사해 고레스가 성전 건축을 승인한 첫 조서를 찾아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대 민족이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리오가 유다의 적들에게 보낸 답신에 이렇게 명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스 6:7-8).
하나님이 잠시 동안의 차질을 허용하신 결과, 성전이 완성될 뿐만 아니라 성전 건축 경비까지 타국의 왕이 전적으로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앞날에 임할 은혜를 꿰뚫어 볼 믿음이 있다면, 어찌 조급함을 이겨 내지 못하겠습니까?
<167-169쪽 중에서>
만일 믿음이 단순히 십자가를 돌아보며 ‘벌을 면했다’는 사실에 머문다면 우리는 계속 원한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서 저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이 파고들어야 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과거를 돌아볼 때 단순히 벌을 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장래를 주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분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그 장래란 그분과의 화목한 교제 안에서 영원히 이어지는 끝없는 내일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딱히 오래된 원한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묵은 상처와 실망에서 당신을 놀랍게 해방하시고, 그것들을 다 내려놓을 은혜를 주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단기적 분노가 있는지도 반드시 점검해 보세요. 오래된 원한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반복적으로 시달리는 좌절이 있지는 않습니까? 똑같은 단기적 분노가 만성적으로 되풀이되지는 않습니까? 자녀나 배우자, 교회 사람, 직장 상사의 어떤 성향이 매주 당신의 속을 긁어 놓습니까? 그래서 이를 갈며, ‘더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이유들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뇌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 경험으로 보아, 반복해서 찾아오는 이런 단기적 좌절도 큰 학대나 배신으로 인한 오래된 원한 못지않게 불신과 싸워야 하는 영역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날마다 구체적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장기적인 것이든 단기적인 것이든,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원한은 장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고지대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원한에 필요한 것은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자기연민, 두려움, 공허감입니다. 하나님은 장래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건만, 원한은 그분으로 만족할 때 임하는 자족과 확신과 충만한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189-190쪽 중에서>
삶에 어떤 일이 닥쳐 당신의 장래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때 잊지 마십시오. 폭탄이 터질 때의 첫 충격파는 죄가 아닙니다. 진짜 위험은 거기에 굴복하는 거예요. 영적 싸움에 나서지 않은 채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항복의 뿌리에는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장래의 은혜를 믿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 길은 고통 없는 길도 아니고, 수동적인 길도 아닙니다. 믿을 만한 신앙의 친구들을 찾으세요. 그들에게 당신의 영혼을 열어 보이고,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세요. 하나님 아버지께 당신의 영혼을 쏟아 놓으십시오. 그분의 주권적 지혜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의 보배롭고 장엄한 약속 안에서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197-198쪽 중에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은 대개 개인 차원에서 자기 몸과 생각으로 무엇을 하든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죄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은 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정작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건 세계 평화나 환경 문제, 인종 화합, 사회 정의, 의료 개혁, 폭력 퇴치 같은 굵직한 문제가 아닌가요? 이 사람 저 사람과 잠자리를 갖는 것쯤은 별일 아니지요. 정의를 위해 시위에 나서거나 제네바 평화 협상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면, 〈플레이보이〉지를 뒤적이는 일쯤이야 지극히 사소한 일 아닌가요?”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아주 다릅니다. 그런 국제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 인간과 관계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단순한 통계 수치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점은 동물이나 나무와 달리 천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지옥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중요한 이유는 숨이 붙어 있어서가 아니에요. 숨이 멎은 뒤에도 영원히 마음과 생각과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은, 정욕의 결과가 전쟁이나 환경 재해의 결과보다 더 해롭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해악은 결국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육체의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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