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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기독교인들이 남긴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잊혀져가는 역사적인 신앙의 유적지 순례!!!
- 각 선교회 모임, 교회기관 수양회,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수련회, 효도 관광, 소그룹 영성훈련은
이제 신앙의 선배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국내 성지순례로!
10명 이상 단체신청만 받으며, 단체신청시 날짜 지정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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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자 | 도 시 | 교 통 | 시 간 | 상 세 일 정 | 식 사 |
| 1일 | 서울 경기도 |
전용차량 | 9:00 12:00 6:00 |
집결 / 출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 제암교회 3.1운동순국기념관 점심식사 한국순교자기념관 소래교회 저녁식사 *숙소 : 관광호텔 덕산온천(4~5인1실) |
조: 중:한식 석:한식 |
| 2일 | 김제 정읍 전주 천안 |
전용차량 | 8:00 12:00 6:00 |
아침식사 김제금산교회 정읍두암교회 점심식사 전주예수병원,전주서문교회 매봉교회(유관순생가) 저녁식사 *숙소 : 관광호텔 덕산온천(4~5인 1실) |
조:한식 중:한식 석:한식 |
| 3일 | 천안 안성 서울 |
전용차량 | 8:00 12:00 6:00 |
아침식사 이천 기독교역사박물관 점심식사 미리내성지 도착 / 해산 |
조:한식 중:한식 석: |
| 상기 일정은 교통여건(항공,선박 등) 및 현지사정으로 인해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
| 여행조건 | 1. 회비에는 차량, 식사(중식), 가이드, 보험, 선박요금 등이 포함됩니다. 2. 조식, 석식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3. 위금액은 단체인원 적용 금액이며, 예약 인원수에 따라 조정될 수 있습니다. |
▶ 양화진 선교기념관, 선교사묘지
“그들은 무엇이 아쉬워 이억 만 리 한국 땅, 잡초로 으슥한 허허 벌판에 누워있을까?”
이 땅이 땅 끝인 줄 알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고국을 떠나
아비와 친척을 멀리하고 복음을 들고 찾아온 아름다운 발들이 묻힌 곳이다.
기독교 100년을 감사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상징으로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가
황폐화된 5천여 명의 외국 선교사 묘역을 공원화 하고 그곳에 한국기독교 선교기념관을 세우고
선교기념관 3층에는 예배 처소를 옮겨 다니면서 예배를 드려야 했던 수도권 거주 외국인들에게
연합교회당으로 사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선교의 조상들이 잠든 묘지공원 기슭에는 엄마, 아빠를 따라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이곳에 왔다가
의료시설 결핍으로 애처롭게 숨져간 꼬마들의 묘지도 있어 길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고 있다.
이 공원묘지는 몇몇 뜻있는 기독실업인들의 헌금 7억원으로 선교기념관과 함께 세워졌다.
▶ 발안 제암리교회
3·1운동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은 제암리 마을 남자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교회당을 불 질러 21명을 학살하고, 마을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며 초가 32채를 불태워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든 비인간적인 일제의 포악의 바람이 할퀴고 간 현장이다.
▶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내린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조성됐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한국교회의 중지를 모아서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고자 용인시 추계리 10만여 평의 임야 위에 1989년 11월 11일에 건립했다.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6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초기에는 ‘혹세무민’한다고,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라며, 6.25때에는 반공, 반동이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는 성경 돌비와 순교자 기념시비가 올라가는 길에 쭉 이어진다. 기념관의 건물은 약3백 66평의 3층 건물 구조이고 전체로는 직사각형에 가운데 원통형 모양을 넣어 아름답게 설계된 건물이다. 1991년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건축가협회상’을 받기도 하였다.
기념관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면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처형장면을 만나게 된다. 이 그림은 혜촌 김학수 장로가 기증한 40점의 역사화들 중 하나다. 혜촌의 그림은 건물 곳곳에 배치되었는데 순교, 고문, 남북의 초기교회들, 교육기관들의 모습을 담고 있어 개신교 100년사를 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2층에 가면 예배실이 있고 예배실의 벽면에는 1930년대 이전 개화기 교회들과 우리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20점이 전시되어 있다. 3층으로 오르면 좌, 우 전시실이 연결되어 있고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 등 202명 순교자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들과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초상화 대신에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외에도 2층에 성서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시대별 성서 40여권이 전시되어 있고, 3층에 상동교회 100주년 특별전시코너가 있다. 기념관 뒤편에는 야외집회장과 개인기도소가 설치되었고, 앞쪽에는 대형 십자가탑과 주기철 목사의 ‘옥중명상’ 시비가 있다.
기념관이 건립된 대지와 임야 10만여 평은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헌납하였고 재미사업가 한규빈 씨가 7억원,
고 정주영 회장이 2억원 외에 각 교회와 교인들의 수많은 헌금으로 건립되었다. 최근에는 진흥문화의 박경진 장로가
진입로 새 포장 사업에 거금을 헌금하였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주기철, 옥중명상에서)
▶ 소래교회(한국 최초의 개신교회)
1884년에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서상륜이라는 사람은 본래 만주를 오가며 인삼장사를 하는 상인이었는데 30세가 되던 1878년에
갑자기 만주에서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맞게 된다.
친구들이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게 되고 그곳에서 로스(John Ross)선교사를 만나 보살핌을 받고,
매킨 타이어(John melntyre)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게 되어 그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병이 완쾌된 다음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게 되고 번역한 성경을
국내로 반입시키다가 수배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외가인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교회를 세우게 된다.
후에 교회 건축을 할 때도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토착민들의 헌금으로 교회를 건축하게 된다.
현재 이 교회 건물은 황해도에 있는 소래교회를 양지에 있는 총회 신학 대학원 캠퍼스 안에 그대로 복원시켜
놓았다.
▶ 김제 금산 'ㄱ'자교회
100년 전에 “ㄱ”자 형으로 지어진 교회로 지금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하나뿐인 교회이다.
수십 개의 신흥종교들이 하나의 단지를 이루다시피 하고 있는 곳에 놀랍게도 일찍이 교회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 기울어져 가고 있던 1904년 무렵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L.B.Tate) 목사는
사교가 우글거리는 이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테이트 목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정읍 간을 말을 타고 왕래하며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 했는데
어느날 그는 이 고장 마방의 주인인 조덕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고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보수 가문이었다.
어느 날 조덕삼이 먼저 마방의 손님인 테이트 선교사에 접근하였고 둘은 서로 많은 교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그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테이트에게 말한다.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이래서 오래도록 기도하였던 테이트의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으며 금산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
시작되었다. 이 금산교회가 시작되는 데는 또 한명의 빼 놓을 수 없는 주역이 있다. 이자익 목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낸 유명한 목사이다.
이 무렵 이자익 청년은 조덕삼 씨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다. 그는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하여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 하였고 또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이 두사람과 박희서가 세례를 받고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금산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도 놀라운 일이 또 있었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로 불어나자 장로 한분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조덕삼 웅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봉건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조덕삼 웅은 의연히 교회앞에 나가 말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마부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두사람이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다.
그 뒤 조덕삼 웅도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시키고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금산교회에 초빙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세 번씩이나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에 되었다.
※ 왜 교회당을 “ㄱ”형으로 지었는가?
한쪽 날개는 남자석, 다른 한쪽 날개는 여자석.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구조이다.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만 남녀석을 번갈아 볼 수 있고,
틈새가 나는 중간에는 흰 포장을 치기도 하였다.
▶ 두암교회
윤임례 집사를 비롯해 23명이 순교한 이곳은 일제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교인들은
교회에 가기 위해 멀리 걸어 다녀야 했던 두암 마을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김용은 전도사가 윤임례 집사 가정을 중심으로 단촐한 기와집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집회를 가졌는데 평양에서 공산주의를 접했던
임전도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이 날 집회도 비판적인 내용을 말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읍에도 공산군이 들어왔고 두암 마을 주변은 공산군과 반공세력간의 총격전이 수시로 벌어졌다.
두암 마을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군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치부되었고 특히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김용은 전도사를 잡기위해 가족과 성도들을 위협하고
날마다 가택수색을 벌이면서 예배 중지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성도들은 굴하지 않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마침내 몽둥이와 대창을 든 공산주의자들은 성도들과 그 가족들 심지어 아이들까지 개 패 듯 했고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마을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결국 윤집사와 아이들은 순교했고
김용은 전도사 동생 김용채 집사는 총에 맞아 고부로 옮겨 치료하던 중 순교하였으며 교회와 교인들의 집안에
짚을 넣고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그 불태운 재 때문에 며칠 동안 동네 우물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 날 학살된 교인은 모두 23명으로 후에 공산군이 철수한 후 서명선 목사와 김용례 사모가
두암 마을을 방문해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고 한다. 시신 수습과정에서 윤임례 집사는 무릎을 굽힌 채
머리 뒤쪽에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에 앞서 기도하다가 뒤에서 칼을 맞아 순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순교의 피는 두암 교회의 귀중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윤임례 집사의 아들인 김용은 목사와 고 김용칠 목사 형제는 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 하는 등 교단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서명선 목사를 비롯해 20여명이 넘는 목회자가 배출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쉽게 복구되지 못했다.
전쟁으로 교회가 불타고 성도들은 대부분 순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4년 두암 마을 출신인 김태곤 전도사가
주일학교를 열면서 두암 교회는 재건되었고 그 후 교회를 새로 견축하였고 가매장 했던 순교자들의 무덤을
교회 동산으로 이장하고 “순교자의 묘”로 합장하였다. 1994년에는 순교자 기념교회당이 순교자 묘지 옆에
세워졌고 순교자 기념탑도 아름답게 세워졌다.
▶ 매봉교회 (유관순생가)
3·1운동 때 유관순이 6개 군을 이끌어 아우내 장터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옥중에서 일본군의 모진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옥중기도와 만세를 부르다 순교한 유관순의 젊은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화여고
유관순기념사업회가 유관순열사기념교회당을 지었고 그의 생가를 복원했다.
▶ 미리내성지 “은하수”라는 뜻의 우리말인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우르슬라,
페레올 주교, 이민식 빈첸시오 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성 김대건 신부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으나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없는 신앙,
놀랄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낯선 이국땅에서 선진서구 문명을 익히고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형장에서 추후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회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라고 말하고
태연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엄한 국사범이라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장례마저 치르지 못하도록 막고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키게 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자인 이민식은 파수의 눈을 피해 죽은 지
40일이 지난 후 김신부의 시신을 빼내 등에 지고 험한 산길 1백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시고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페레올 신부의 유언을 따라 그를 김신부의 옆자리에 안장했다.
1972년에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어 김대건 신부 동상을 비롯하여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을 세웠고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겟세마네 동산을 꾸며 놓았는데 이는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 그 반대로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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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교회 올라가는 길

두암교회에 도착한 순례자들

전주서문교회

현 매봉교회 옆에 유관순생가를 복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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