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291013 홀리투어
[2박3일]제주도에서 서울까지의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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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설명

초대 기독교인들이 남긴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잊혀져가는 역사적인 신앙의 유적지 순례!!!

- 각 선교회 모임, 교회기관 수양회,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수련회, 효도 관광, 소그룹 영성훈련은
이제 신앙의 선배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국내 성지순례로!

최소 구성인원 10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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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도 시 교 통 시 간 상 세 일 정 식 사
1일 제주도
서울



경기도용인


충남서산
비행기
전용차량
8:00

12:00







18:00
제주공항에서 만남
제주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비행기로..
점심식사
서울 합정역에 있는 양화진선교사묘지공원에서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며..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으며..
제암교회 3.1운동순국기념관
해미 생매장 순교지
저녁식사

*숙소 : 덕산온천 관광호텔
조: 
중:한식
석:한식
2일 충남서산
전북김제
전북정읍

전남순천
전남남원
전용차량 8:00


12:00

18:00
아침식사
우리나라 문화재지정 'ㄱ'자교회인 금산교회
23인 순교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두암교회
점심식사
기독교역사박물관
저녁식사

*숙소 : 남원콘도
조:한식
중:한식
석:한식
3일 전남남원
전남여수

전남완도
전용차량


8:00

12:00
15:00
아침식사
애양원 손양원목사님 기념관
점심식사
완도에서 제주로(배이용)
조:한식
중:한식
석: 
상기 일정은 교통여건(항공,선박 등) 및 현지사정으로 인해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여행조건 1. 회비에는 차량, 식사(중식), 가이드, 보험, 선박요금 등이 포함됩니다.
2. 조식, 석식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3. 위금액은 단체인원 적용 금액이며, 예약 인원수에 따라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양화진 선교기념관, 선교사묘지

“그들은 무엇이 아쉬워 이억 만 리 한국 땅, 잡초로 으슥한 허허 벌판에 누워있을까?”

이 땅이 땅 끝인 줄 알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고국을 떠나
아비와 친척을 멀리하고 복음을 들고 찾아온 아름다운 발들이 묻힌 곳이다.

기독교 100년을 감사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상징으로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가
황폐화된 5천여 명의 외국 선교사 묘역을 공원화 하고 그곳에 한국기독교 선교기념관을 세우고
선교기념관 3층에는 예배 처소를 옮겨 다니면서 예배를 드려야 했던 수도권 거주 외국인들에게
연합교회당으로 사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선교의 조상들이 잠든 묘지공원 기슭에는 엄마, 아빠를 따라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이곳에 왔다가
의료시설 결핍으로 애처롭게 숨져간 꼬마들의 묘지도 있어 길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고 있다.

이 공원묘지는 몇몇 뜻있는 기독실업인들의 헌금 7억원으로 선교기념관과 함께 세워졌다.

▶ 발안 제암리교회

3·1운동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은 제암리 마을 남자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교회당을 불 질러 21명을 학살하고, 마을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며 초가 32채를 불태워
마을 전체를폐허로 만든 비인간적인 일제의 포악의 바람이 할퀴고 간 현장이다.

▶ 해미 생매장 순교지

해미 성지는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0년의 박해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그 서슬이 끊이지 않았던 이곳은 수천 명의 이름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에 생매장 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는 곳이다.
여러 박해기간을 거치면서 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뿐 아니라 해미진영 단독으로 내포지방의 교우들을
잡아 죽였다.

박해기간 동안 해미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에 끌려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해미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었고 냇물은 핏물로 항상 얼룩진 붉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 박해 때는 시체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한꺼번에 생매장을 하였고 해미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데나 땅을 파고 그 구덩이에 산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이렇게 쓰러져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는 걸로 추산하고 있으나 그들 중 약 70여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이름 석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무명 순교자 들이다.
이들이 숨져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되어있고 “예수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들었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는 생매장 순교지는
현재 16개의 순교 탑과 생매장 터인 진둥벙이 14처와 노천성당으로 단장되어 보존되고 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에는 감옥 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이던 호야나무가 남아있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 돼 있고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어 전시돼 있다.

▶ 순천 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전남 선교의 선구자인 유진벨(Rev. Bell Eugene)선교사의 외손이고 대전 한남대학을 설립한
인돈 박사(DR. William Linton)의 3남인 인휴 목사(Rev. Hugh Linton) 가 1954년 순천 선교부에 부임함으로
3대에 걸쳐 선교사역을 펼치다가 1970년 등대선교회를 창립하여 진주, 목포지방과 1974년도 전국교회개척
\후보지를 조사하여 1,181개 처의 교회 개척 후보지를 발굴하고 전국적으로 1천교회의 개척운동을 전개하다가
결실이 무르익어 가는 1984년 4월 10일 자동차 사고로 주님의 부르심을 입어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그 후 안기창 목사를 위시하여 등대선교회에서는 인휴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추진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기독교 역사박물관으로 세워지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기념박물관이다.

우리나라가 36년간 일제의 강점 아래서 우리 문화가 말살되고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도 선교의 얼을 이어받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투옥되고 또 순교로써 항거하였으며 6.25동란의 전쟁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열심히 선교하였고
본국에 호소하여 전화로 굶주린 백성들을 도왔으며 미국사회에 한국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가를 알리고
또 도움을 주었다.

또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교회를 세워 학당으로 사용하면서 신학문을 배우게 하고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밝혀주고 시야를 넓혀 주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심어준 믿음으로 민족적인 역경을 승리로 이끌어온 선열들의 신앙과 애국적인 기풍을
이 선교기념관에서 한눈에 엿 볼 수 있다.

▶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내린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조성됐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한국교회의 중지를 모아서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고자 용인시 추계리 10만여 평의 임야 위에 1989년 11월 11일에 건립했다.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6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초기에는 ‘혹세무민’한다고,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라며, 6.25때에는 반공, 반동이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는 성경 돌비와 순교자 기념시비가 올라가는 길에 쭉 이어진다. 기념관의 건물은 약3백 66평의 3층 건물 구조이고 전체로는 직사각형에 가운데 원통형 모양을 넣어 아름답게 설계된 건물이다. 1991년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건축가협회상’을 받기도 하였다.

기념관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면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처형장면을 만나게 된다. 이 그림은 혜촌 김학수 장로가 기증한 40점의 역사화들 중 하나다. 혜촌의 그림은 건물 곳곳에 배치되었는데 순교, 고문, 남북의 초기교회들, 교육기관들의 모습을 담고 있어 개신교 100년사를 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2층에 가면 예배실이 있고 예배실의 벽면에는 1930년대 이전 개화기 교회들과 우리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20점이 전시되어 있다. 3층으로 오르면 좌, 우 전시실이 연결되어 있고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 등 202명 순교자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들과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초상화 대신에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외에도 2층에 성서의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행된 시대별 성서 40여권이 전시되어 있고, 3층에 상동교회 100주년 특별전시코너가 있다. 기념관 뒤편에는 야외집회장과 개인기도소가 설치되었고, 앞쪽에는 대형 십자가탑과 주기철 목사의 ‘옥중명상’ 시비가 있다.

기념관이 건립된 대지와 임야 10만여 평은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헌납하였고 재미사업가 한규빈 씨가 7억원, 고 정주영 회장이 2억원 외에 각 교회와 교인들의 수많은 헌금으로 건립되었다. 최근에는 진흥문화의 박경진 장로가 진입로 새 포장 사업에 거금을 헌금하였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 (주기철, 옥중명상에서)



▶ 여수 기독교성지 (애양원,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등)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워진 애양원은 1939년 손양원 목사가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으며 애양원 병원 원장을 겸임하면서 사역했던 곳이다.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 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이외 수많은 교민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50년 6.25 동란때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두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아들로 삼아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품안에 돌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도 끝내는 애양원 환자들과 함께 공산당에게 순교당했다.

현재 애양원 기독 성지 안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의료, 직업, 정신적 재활을 돕는 사회복지 법인 애양원이 있고,
병원으로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여수애양병원이 있다.

이 병원안에는 정형외과, 피부과, 마취통증과, 내과등이 있으며 특히 정형외과는 각종 마비현상과 골절,
인공관절등의 수술로 유명하며 연간 4만여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있으며 3천여 환자를 수술하므로
한국 단일병원 관절 수술로는 한국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또 성산교회(애양원교회)가 설립 100주년을 자랑하고 있으며, 노인 한센병 환자들의 평안한 여생을 위한
쉼터인 애양평안요양소, 애양재활직업보호소 그리고 토풀원장의 신앙정신이 살아있는 토풀하우스와
한센병 치료체험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애양원 역사박물관, 통나무식당, 성경암송관,
초기 한센병 환자 주택, 치유된 환자들의 정착마을인 도성마을, 순교자 손양원 목사 부부와 아들 동인,
동희의 묘지, 그리고 순교기념관등이 잘 가꾸어 보존되어 있다.

▶ 지리산 노고단 선교유적지

북한군이 빨치산이 되어 숨어들어가자 국군토벌대가 주둔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이며
민족상잔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뱀사골을 지나 갖가지 야생화가 천국을 이루고 있는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면 노고단 정상 바로 밑 매점.대피소옆에 일제강점기시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어놓은 50여채의수양관들이
들어서 있던 장소가 있다.

이곳 수양관지대는 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중국,일본등지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심신의 피로을 풀고
치료하는 안식처로 혹은 영적 재충전하는 장소로 또한 풍토병에 시달리던 선교사에게는 쉬면서 치료를 받던
주요한 곳으로 사용되어 졌던 곳이다. 이곳에서 특히 한글 성경번역과 주요 성경공부 교재의 번역이 이루어졌고
선교전략 계획을 수립하는 장소의 역할로 크게 기여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14연대 사건(일명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하던 것을
국군토벌대가 점령하였고 6.25 전쟁 시에는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 노고단 밑의 수양관들을
모두 태워 버렸고 건너편 왕시루봉에 있는 몇 채의 집만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그 후 노고단에 조금 남았던 수양관의 흔적들도 사라호 태풍에 모두 훼손되었고
지금은 교회건물의 흔적만 남아있다. 1925년에 지어진 옛 건물인데도 서양벽난로 등이 설치되 있어
현대적인 건물 구조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 흔적만 남은 이 유적지는 신앙교육, 선교사들간에 단합,
그리고 교회지도자의 수련활동을 하던 곳으로 변요한(DR.Preston)선교사의 책임 하에 세워졌다.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삼면의 벽을 중심으로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 건물이 복원되면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유적지 복원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그 자료들을 준비중에 있다.

▶ 두암교회

윤임례 집사를 비롯해 23명이 순교한 이곳은 일제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교인들은 교회에 가기 위해 멀리 걸어 다녀야 했던 두암 마을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김용은 전도사가 윤임례 집사 가정을 중심으로 단촐한 기와집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집회를 가졌는데 평양에서 공산주의를 접했던
임전도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이 날 집회도 비판적인 내용을 말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읍에도 공산군이 들어왔고 두암 마을 주변은 공산군과 반공세력간의 총격전이
수시로 벌어졌다.

두암 마을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군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치부되었고
특히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김용은 전도사를 잡기위해 가족과 성도들을 위협하고
날마다 가택수색을 벌이면서 예배 중지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성도들은 굴하지 않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마침내 몽둥이와 대창을 든 공산주의자들은 성도들과 그 가족들 심지어 아이들까지 개 패 듯 했고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마을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결국 윤집사와 아이들은 순교했고
김용은 전도사 동생 김용채 집사는 총에 맞아 고부로 옮겨 치료하던 중 순교하였으며
교회와 교인들의 집안에 짚을 넣고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그 불태운 재 때문에 며칠 동안 동네 우물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 날 학살된 교인은 모두 23명으로 후에 공산군이 철수한 후 서명선 목사와 김용례 사모가
두암 마을을 방문해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고 한다. 시신 수습과정에서 윤임례 집사는 무릎을 굽힌 채
머리 뒤쪽에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에 앞서 기도하다가 뒤에서 칼을 맞아 순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순교의 피는 두암 교회의 귀중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윤임례 집사의 아들인 김용은 목사와 고 김용칠 목사 형제는 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 하는 등
교단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서명선 목사를 비롯해 20여명이 넘는 목회자가 배출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쉽게 복구되지 못했다. 전쟁으로 교회가 불타고 성도들은 대부분 순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4년 두암 마을 출신인 김태곤 전도사가 주일학교를 열면서 두암 교회는 재건되었고
그 후 교회를 새로 견축하였고 가매장 했던 순교자들의 무덤을 교회 동산으로 이장하고
“순교자의 묘”로 합장하였다.
1994년에는 순교자 기념교회당이 순교자 묘지 옆에 세워졌고 순교자 기념탑도 아름답게 세워졌다.

▶ 김제 금산 'ㄱ'자교회

100년 전에 “ㄱ”자 형으로 지어진 교회로 지금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하나뿐인 교회이다.

수십 개의 신흥종교들이 하나의 단지를 이루다시피 하고 있는 곳에 놀랍게도 일찍이 교회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 기울어져 가고 있던 1904년 무렵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 (L.B.Tate) 목사는
사교가 우글거리는 이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테이트 목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정읍 간을 말을 타고 왕래하며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 했는데
어느날 그는 이 고장 마방의 주인인 조덕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고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보수 가문이었다.

어느 날 조덕삼이 먼저 마방의 손님인 테이트 선교사에 접근하였고 둘은 서로 많은 교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그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테이트에게 말한다.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이래서 오래도록 기도하였던 테이트의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으며 금산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
시작되었다.

이 금산교회가 시작되는 데는 또 한명의 빼 놓을 수 없는 주역이 있다. 이자익 목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낸 유명한 목사이다.

이 무렵 이자익 청년은 조덕삼 씨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다. 그는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하여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 하였고 또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이 두사람과 박희서가 세례를 받고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금산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도 놀라운 일이 또 있었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로 불어나자 장로 한분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조덕삼 웅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봉건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조덕삼 웅은 의연히 교회앞에 나가 말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마부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두사람이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다.
그 뒤 조덕삼 웅도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시키고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금산교회에 초빙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세 번씩이나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에 되었다.


※ 왜 교회당을 “ㄱ”형으로 지었는가?

한쪽 날개는 남자석, 다른 한쪽 날개는 여자석.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구조이다.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만 남녀석을 번갈아 볼 수 있고,
틈새가 나는 중간에는 흰 포장을 치기도 하였다.

관련이미지

금산 ㄱ자 교회


두암교회와 순교비


순교자기념관


해미 수천명의 순교자 합동묘


현 두암교회와 순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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